휴전협정일에 태어나다

  • 정동영은 1953년 7월 27일 전북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에서 전북 도의원을 지낸 정진철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 탄생은 두 가지 운명을 동반하고 있었다. 그가 태어난 날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로 하여금 한반도의 공존과 통합에 관한 책무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이도록 했으며, 그가 태어나기 전 전쟁 중 유아기에 병사 한 네 명의 형은 그를 장남이자 13대 종손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평생 가계와 가정을 돌보며 가족의 화목을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여기게 되었다. 고향 마을에 있는 율북초등학교를 다니던 정동영은 초등학교 6학년 전주로 유학을 나간 뒤 전주북중과 전주고를 졸업했다. 이 기간에도 불행한 가정사는 이어져 그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와병하던 아버지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셨다.
    그는 홀어머니와 세 명의 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의 역할과 가난을 떠맡게 됐고, 아울러 암담한 시대상황까지 맞닥뜨리게 됐다.
  • 정동영은 10월 유신이 선포된 1972년 서울대 국사학과에 입학했다. 72학번 동기생의 징역형을 다 합하면 100년이 넘는다는 말이 나올만큼 투옥과 수배가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정동영 역시 최초의 유신 반대 학생시위로 기록된 1973년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데모에 참가했으며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돼 구치소에 구금됐다. 다음 해에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3개월간 복역한 후, 출감하자마자 군에 강제 징집됐다. 구치소를 드나드는 아들 걱정에 정동영의 어머님은 동생들을 데리고 서울로 올라와 봉제공장을 시작했다.
    성동구 사근동 한양대학교 뒤편 언덕배기에 작은 집 방 한 칸에 재봉틀 몇 대를 들여놓고 아동복 바지를 만들어 평화시장에 내다파는 일이었다. 정동영은 직접 천과 단추를 사러 다니고 오버로크를 친 천을 둘러메고 청계천과 사근동 언덕길을 오갔다. 군대에서 제대한 뒤 졸업할 무렵에는 평화시장에서 본격적으로 옷 장사를 할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시대정신을 담고 진실을 보도했던 기자 정동영

  • 대학 졸업과 동시 MBC TV 보도국에 입사한 정동영은 1996년까지 18년 간의 기자생활을 통해 여러 가지로 가슴 아픈 격동의 현대사를 몸소 겪었다. 광주항쟁 당시에는 도보로 광주시내로 들어가 빗발치는 총성을 들으며 도청 앞에서 취재했다. 하지만 그의 리포트는 보도되지 못했고, 2007년 5월 그 보도되지 못한 정동영의 5.18 리포트가 우연히 발견돼 27년 만에 세상에 알려졌다.

    주미특파원 시절에는 걸프전과 독일 통일을 현장에서 취재했으며 1986년에서 다음 해까지 정동영은 영국 웨일즈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이 기간 그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선진국의 언론과 사회에 대해 깊이 천착했으며 언론학 석사를 취득했다.
    그 뒤 앵커로 재직하는 동안에도 언론인으로서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암울한 시대상황과 대적할 수 밖에 없었다. 1988년 4월 제13대 총선 때의 한 가지 사건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명확히 분별하는 그의 언론관을 여실히 드러내 보인다.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정당 소속 후보가 총선을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우편으로 돈 봉투를 배달하다가 적발된 사건이 있었다.
    9시 저녁뉴스가 시작되면 “전두환 대통령은…”으로 시작되는 ‘땡전뉴스’가 나가던 시절로 보도국은 철저한 통제 하에 있었고, 이러한 종류의 기사는 보도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마감뉴스를 진행하던 정동영 앵커는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각오를 하고 자신이 책임지겠다며 이 기사를 톱뉴스로 내보냈다.
  • MBC 보도국이 발칵 뒤집혔고 세상도 뒤집혔다. 당선이 확실시되던 민정당 후보들이 우수수 떨어지고 야당후보가 대거 당선됨으로서 정국은 ‘여소야대’가 됐다.
    또한 그는 다른 언론에 앞서 한겨레신문 창간을 최초로 보도하기도 했다. 지금에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정국에서는 쉽게 결단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정권교체, 정풍운동의 선두에

  • 1995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은 정동영의 인생에 또 다른 장을 열었다. 당시 붕괴현장에서 참상을 생중계하면서 느낀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패에 대한 실망과 분노로 갈등하던 그는 이러한 사회를 개선하겠다는 생각으로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당시 김대중 총재의 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정계에 입문할 때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 총재는 직접 정동영을 기자실에 데리고 내려가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데 크게 기여할 인물”이라고 소개했다.
    1996년 4월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는 커다란 인생의 전기였으며 방송기자 생활을 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선거 기간 동안 선거 경험이 없었던 그로서는 유권자들을 직접 만나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골목골목을 누비고 다녔다. 결국 유권자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로 ‘전국 최다 득표 당선’이라는 성원을 얻었다.
  • 1997년 대선 때 정동영은 김한길 의원과 함께 TV 대책을 실무지휘하며 정권교체에 큰 기여를 했다. 1997년 12월18일, 당시 김대중 총재와 김한길 의원, 그리고 정동영은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고 일산 자택에서 개표상황을 지켜보았으며 그 때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이회창 후보에게 뒤지다가 자정 쯤 당선이 확정된 순간, 마침내 37년 동안 한 번도 흐르지 않고 한 곳에 고여 썩고 있던 민주주의가 다시 생기를 되찾는 역사적인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정치에 입문한 목적을 이룬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2000년 16대 총선에서도 정동영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국회의원 2회 연속 전국 최다득표 당선이라는 영광을 얻었다. 당선 이후 정동영은 8.30 최고위원 선거에 출마했다. 경선 과정에서 정동영이 처음 내세운 메시지는 특유의 겸손함을 앞세운 ‘노장청 통합론’이었다. 노장 일색이 아니라 청년도 한 자리쯤 끼워 넣어 달라는 수세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지방 개편대회에서 지구당위원장들의 좌절감과 분노하는 바닥 민심을 절절이 전해들은 정동영은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이미 교정지까지 나와 있는 자신의 홍보 전단을 전면적으로 뜯어 고쳤다. ‘확 바꿔놓겠습니다’라는 공격적 메시지를 동원했다. 많은 당직자들로부터 지나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결국 정동영은 40대 기수론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대의원 35%의 지지를 얻으며 5위를 차지, 집권당 최연소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정동영의 가장 큰 장점으로 꼽았던 것이 바로 그의 폭발적인 연설능력이었다. 이에 대해 정동영은 “선거기간 중에 제 연설솜씨가 화제가 됐는데 말솜씨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메시지가 중요했다고 봅니다.”라고 답변한 바 있다.
    그러나 최고위원 당선 이후 시련의 계절이 왔다. 12월 5일 아침, 신문에는 "정동영, 권노갑 2선 퇴진 요구"라는 활자가 대문짝만하게 실려있었다. 사흘 전 청와대에서 비공개로 열렸던 민주당 최고위원회의 중 정동영이 말했던 내용이 집중적으로 실려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동영은 대통령 앞에서 ‘국민의 눈엔 우리 당권 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는데 이것은 정풍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당시 정동영 후보의 발언은 여권 전체를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었다. 그러나 살벌한 분위기에 포위된 속에서도 정동영은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고, 결국 들끓는 여론의 압력은 12월15일 권노갑 최고위원을 자진사퇴하게 만들었다.

2002 경선지킴이, 돼지아빠 정동영

  • 모두가 인정하다시피 2002년 국민경선을 처음 제안하고 마지막으로 제도적 완성까지 해낸 주역은 사실상 정동영이다. 당정 쇄신운동을 전개할 때부터 정동영이 말하는 정치의 목적은 정치를 개혁하고 이 에너지를 바탕으로 국가를 쇄신하는 것이었다. 정치개혁의 핵심은 '권력의 오너십'을 깨뜨리고 국민에게 정치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봤다. 그 결실이 2002년 1월, 역사적인 국민참여경선제로 나타났다. 정동영은 ‘국민참여경선제’야말로 정치를 국민에게 돌려주는 획기적인 제도로서 한국 정치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자부했다.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을 끝으로 마침내 국민참여경선은 그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8주라는 국민경선 기간의 매일매일이 정동영에게는 실제로 무릎이 꺾이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당시 심정에 대해 정동영은 “권투 경기로 치자면 매주말 대회가 열릴 때마다 카운터 펀치를 날린 친구는 만세를 부르며 환호를 받는데, 나는 링 바닥에 다운당하는 셈이었다”고 밝혔다.
    한편, 정동영은 민주당의 비노(非盧),반노(反盧) 의원들이 자신들이 뽑아놓은 노무현 대통령 후보 흔들기를 할 때도 꿋꿋하게 노무현 후보를 지켜 주는 의리를 보여줬다. 이를 두고 한 언론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과 대선에 「페어 플레이 상(賞)」이 있었다면, 그건 분명 그의 몫이었다”라고 평가했다.

  • 정동영은 민주당의 공식적인 선거조직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동안 자발적인 노무현, 민주당 지지자를 결집한 국민참여운동본부의 공동본부장을 맡아 대선 운동 기간 내내 당시 노무현 후보와 함께 짝을 이뤄 전국을 돌았다. 국민참여운동본부의 대표적인 운동은 ‘희망돼지 모으기’였는데 정동영은 ‘돼지저금통’을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국민들로부터 ‘돼지 아빠’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국민통합 21」의 정몽준 후보가 노무현 후보 지지 철회를 결심하게 되는 운명의 12월18일 밤, 그 정면 충돌의 발단이 바로 정동영이었다. 마지막 종로 거리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차기에는 추미애 최고위원과 국민경선을 끝까지 지켜준 정동영 고문이 있다”고 연설했고, 이후 정몽준 후보가 곧바로 결별을 선언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에 대해 정동영은 “그날 밤 한숨도 못 잤다. 우리 역사가 이렇게 마지막에 와서 뒤틀릴 수가 있나. 이거 잘못되면 내가 만고의 역적이 되겠구나 싶었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몽골기병론'을 기치로 4.15 총선 압승

  • 제16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2002년 12월 22일, 정동영을 포함한 민주당내 개혁그룹의원들은 신당 창당을 제안했다. 노무현 후보의 당선은 낡은 정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승리인만큼 지역분열 구도와 낡은 정치의 틀을 깨기 위해 민주당이 발전적으로 해체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2003년 11월 11일,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공식 출범했으나 전당대회가 열릴 때까지 국민들의 시선은 따뜻하지 않았다. 당 지지율은 10%대로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정동영 후보는 3김 시대의 청산과 정당민주화를 주창하며 당원 직선제를 주장했고 선거를 통해 초대 당의장으로 당선되었다. 당선되자마자 정동영은 새벽부터 재래시장을 찾았고, 택시 기사들을 만나 고충을 들었다. ‘막힌 곳은 뚫고 가려운 곳은 긁어준다’는 신념으로 민생현장을 찾아 동분서주했다.
    이와 같은 정동영의 역동성과 현장정치, 민생정치로 인해 마침내 전당대회 후 한 달 만에 당지지율이 25%선에 육박했고, 두 달 정도가 지나면서 당 지지율은 30%를 넘어섰다. 이를 두고 당원들은 ‘기적’이라고도 표현했다.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이 올라가자 한나라당과 민주당 내에서 이대로라면 총선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위기 의식이 팽배해졌고 결국 그들은 ‘대통령 탄핵’카드를 들고 나왔다. 그러나 국민은 2004년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에 과반수가 넘는 1백52석이란 선물을 안겨 주었고 오후 6시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 되는 순간 정동영은 결국 눈물을 흘렸다.
  • 4.15 총선 압승 이후 정동영은 명실상부한 유력 대권주자로서 자리매김했다. 2004년, 2005년 여론조사들을 보면 당시 정동영의 인기를 알만 하다. 2004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 따르면 당대표 호감도에서 41.4%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으며, 차기 대통령감으로 가장 유력한 정치인에서도 42.1%로 1위를 했다. 또 2005년 2월 시사저널 여론조사를 보면 열린우리당 대권후보로 가장 유력한 인물에서 38.1% 로 1위를 차지하며 이미 ‘정동영, 이명박 싸움’이라고 예견된 바 있다.

잠자던 개성공단을 100일만에 가동시키다

  • 김정일 위원장관의 6.17면담, 북핵 위기를 해결한 9.19 공동 성명 타결, 이산가족 화상 상봉 시대 개막 등 모두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 재임시절 이루어 낸 성과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통일부 장관 정동영의 대표 업적은 바로 개성공단이다.
    당시 통일부 장관에 취임한 정동영은 개성공단 100일 작전을 폈다. 미국으로 날아가 럼스펠드 국방장관, 라이스 외교안보 보좌관, 파월 국무장관 등을 직접 만나 개성공단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동의를 얻어내었으며 그 결과 2005년 연말, 허허벌판에 개성공단이 들어서게 했다. 설계도뿐인 개성공단을 5개월 15일만에 현실로 바꿔낸 것이다.
MY DY | 방송국 | DiarY | 포토앨범 | Blog | 이슈 | 의정활동 | 통하기 | 자료실

의원회관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의사당대로1 국회의원회관 906호 / 전화 02-784-9540, 9541 / 팩스 02-788-0245 지역사무소 : 전라북도 전주시 덕진구 안덕원로 111, 3층 / 전화 063-277-9766 / 팩스 063-277-9767 후원계좌 (예금주 : 국회의원 정동영 후원회) : 전북은행 1013-01-1172019 / 농협은행 301-0194-1076-41